개미지옥 17

2015.7.3. 술주정

오늘 해야할 일들을 모두 재끼고 친구를 만났다. 저녁에 잠깐만 보려고 했던건데 그러지 못했다. 술을 많이 먹었다. 집 근처에서 잠시 머뭇대다가 그가 살던 집 근처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살던 집 앞, 그가 항상 차를 대던 그 주차장 앞에 멈춰섰다. 초점 흐린 눈으로 그가 살던 집 창문을 하염없이 올려다 보았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년 반도 넘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집구조가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렸던 나또한 생생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가 언제나 고집을 부리며 다녔던 그 길로. 힘들게 뭐하러 언덕으로 다니냐는 핀잔을 주던 그 길. 그는 나를 보러 올때도, 나를 바래다주고 갈 때도 언제나 그 힘든길로 다녔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 오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

개미지옥 2023.06.07

2015.3.18.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이십대 중반, 취업도 못하고 학교도 졸업해 소속도 없던 딱 백수였던 그 시절, 똑같은 백수를 만난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에게 기념일이니 생일이니 챙기지말고 마음만 나누자고 했었다. 내가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서, 또 그가 부담을 가질까 봐. 그는 동의했었지만 그래도 뭔 날이 되면 작지만 소박한 선물을 주었다. 나는 기념일 같은 날들을 챙기기보다 평소에 반찬을 해서 주거나 목도리를 떠주는 식으로 뭔가를 직접 만들어 보답했고 그가 그 마음을 알 거라고 착각했었다. 종국에 그가 내게 남긴 말은 날 사랑하지 않는 것같다. 너에게 받은 것이 없다. 였고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네 놈이 사랑이 뭔지나 알기나 하는 놈이겠냐고. 차라리 잘됐다. 가버려라 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

개미지옥 2023.06.07

2014.10.21. 일기

나는 힘들고 괴로울 때 일기를 쓴다. 그래서 일기장은 폐허와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힘들고 외로울 때 연애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연애는 폐허와 같았다. 눈물자국과, 힘주어 긁어댄 날린 글씨 투성이의, 누군가에 대한 저주가 가득한 일기장처럼 그러한 연애도 결국 상대 때문에 울고 가슴에 상처내며 상대를 저주하며 끝을 맺곤했다. 피곤한데 유독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쓰잘데기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때문만은 아니다. 흑백의 일기장이나, 부서진 감정이나 어쨌건 그 모든게 나였으며 과연 무지갯빛 총천연의 미래가 있을까 싶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도 한 몫 하기 때문일테다. 나는, 내가, 라는 단어와 과연, 이란 단어로 이어지는 끝없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 일기장처럼 지워지지 않는 과거에 붙잡힌 불쌍한 내 자신과..

개미지옥 2023.06.07

2014.9.23. 후회

나는 이기적인 꿈을 꿨고 너는 현실이었다. 술냄새가 나던 사랑한다는 말들이 당신의 용기였고 진심임을 알면서도 당연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내 불찰이었다. 온 세상이 내 것같던 시간도 있었고 온 세상을 잃은 것같던 시간도 있었다. 네가 준 모든 경험 때문에, 그 익숙함 때문에 많은 것들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덕분에 나는 나를 돌아보았고 내 잘못을 인정했고 너를 그립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리고 또 미지의 누군가를 상상하는 지겹게 반복되었던 연애가 후회는 남지만 후회만을 남기지는 않았음을. 진심의 미소로 깨달을수 있는 내가. 내일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개미지옥 2023.06.07

2014.8.30. 꿈

꿈에 극진하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너무나도 가볍게 눈이 떠졌었다. 왜소하고, 작고, 몸 어딘가가 몹시 아프고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이었다. 일전에 본 적도 없고 비슷한 사람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정말 평범하고 평범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노란티를 입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와 나란히 앉아있던 나는 처음에는 그가 낯설어 멀찍이 앉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가 편해졌고 조금 더 지나자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고 어느순간 기대어 있던 나는 꿈 속임에도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르륵 꿈 속에서 잠이 들자 그는 내 어깨를 힘주어 안아주었다. 그 알 수없는 든든함. 편안함에 이제 잠에서 깨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 하다가 아니, 이대로는 안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다급하게 이름을 묻자 그는 웃으며 두 ..

개미지옥 2023.06.07

2014.6.4. 익숙해짐

그는 매너가 좋은 남자였다. 그는 작은 짐이라도, 옮기는 거리가 짧더라도 내게서 덜어주었다. 그는 언제나 도로 쪽으로 걸었다. 방향이 바뀌면 빙 돌아서 다시 도로쪽으로 걸었다. 그는 어디든 문을 먼저 열어주었고 테이블 안쪽에 나를 앉혔다. 성격이 급해서 먼저 문을 밀고 나가면 그 문을 붙잡아 걸리지 않게 해주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항상 데리러 와주었다. 그는 섬세한 남자였다. 무슨데이 무슨데이 의미없다고 툴툴대도 항상 챙겨줬었다. 생일이나 기념일엔 언제나 꽃다발을 먼저 내밀었다. 서툴지만 이벤트도 해주고 지나가며 본 예쁜 카페엔 꼭 나를 데려갔다. 잘 질려하는 날 위해 레스토랑도 언제나 새로운 곳을 예약해 주었다. 콧바람 넣는걸 좋아하는 날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 주었다. 손잡는걸 좋아하는 나에게 언제나..

개미지옥 2023.06.07

2014.4.24. 개미지옥

심장이 몸 밖으로 터져나올듯 두근거리고 폐는 조여와 가슴 한가운데가 저려오고 1분에 한번씩 뭔가가 덜컹덜컹 내려앉아. 30초에 한번씩 숨을 몰아쉬고 있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도 없고 정말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어. 걸어봐도. 달려봐도. 누군가를 만나도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 뿐이야. 그래 그 말도 안되는 다른 생각 뿐이야. 오늘은 아무일도 없었다. 그리고 내일도. 나는 여기에 왜 있는거지. 잊어버리면 안되는데 내 손과 머리가 자꾸 다른 곳을 향해서 미쳐버릴것 같아. 손목을 부러뜨리고 눈을 파버리고 귀를 잘라내고 싶을만큼 딱 그만큼 괴로워. 찾아다녔어. 그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미련이지만 그렇게 되고야 마는 나는 왜. 여기에. 동조를 찾아 다니지만 어디에도..

개미지옥 2023.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