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지옥

2014.6.4. 익숙해짐

ㅇ심해어ㅇ 2023. 6. 7. 00:43

그는 매너가 좋은 남자였다.

그는 작은 짐이라도, 옮기는 거리가 짧더라도 내게서 덜어주었다.
그는 언제나 도로 쪽으로 걸었다. 방향이 바뀌면 빙 돌아서 다시 도로쪽으로 걸었다.
그는 어디든 문을 먼저 열어주었고 테이블 안쪽에 나를 앉혔다.
성격이 급해서 먼저 문을 밀고 나가면 그 문을 붙잡아 걸리지 않게 해주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항상 데리러 와주었다.

그는 섬세한 남자였다.

무슨데이 무슨데이 의미없다고 툴툴대도 항상 챙겨줬었다.
생일이나 기념일엔 언제나 꽃다발을 먼저 내밀었다.
서툴지만 이벤트도 해주고 지나가며 본 예쁜 카페엔 꼭 나를 데려갔다.
잘 질려하는 날 위해 레스토랑도 언제나 새로운 곳을 예약해 주었다.
콧바람 넣는걸 좋아하는 날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 주었다.
손잡는걸 좋아하는 나에게 언제나 손을 먼저 내밀어주었다.
추운 날도, 더운 날도, 언제나 그의 주머니엔 그와 나의 손이 있었다.
아무리 졸리고 술에 취해도 잘자라는 안부전화를 반드시 했고
점심시간, 저녁시간엔 하루도 거르지않고 끼니를 챙겼냐 전화를 했다.
뭐든 내 의견을 먼저 묻는 남자였다.
뭐든지 내 시간에 맞춰주던 남자였다.

그는 건강한 남자였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생각도 건전하고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비실대는 날 위해 보약, 건강보조제, 심지어 생리통때문에 힘들어한다고
감마리놀렌산을 구해주기도 했다.
운동을 함께 해주고 건강을 걱정해 주던 남자였다.
내가 간혹 삐딱선을 타려 할때도 쓴소리로 붙잡아주던 남자였다.
언제나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할 줄 알던 남자였다.


그는 고마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내가 그에게 뭔가를 해주면 그 두배 세배로 되돌려주려 했다.
오히려 미안해하면 나중에, 나중에 갚으라며 웃어주었다.

그는 재미있는 남자였다.
애교를 떨어주기도 하고, 몸개그를 보여주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유행어를 알려주고 우스꽝스런 춤을 춰 빵빵 터뜨려주기도 했다.
그와 있는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없으면 안되는 여자가 되어갔다.
일거수 일투족 서로의 생활에 관여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긴 시간 섞여갔다.
네 것과 내 것의 구별이 없고
그의 입 안에 든 음식을 내가 먹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을만큼
그런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갔다.

모든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고마운 줄 모르는 것들이 많아졌다.
나는 그에게 점점 무뎌졌고 남자라기보다 식구가 되어갔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남자로 있고 싶어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그는 이제 나에게 남자가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와의 사이에 어떤 뜨거운 것들이 식고 있었다.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괴로워졌다.
그를 자연스럽게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갔다.

지겨워. 지겨워. 이제 반복되는 모든 것이 지겨웠다.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모든 것이 이제
무의미하다며 건너 뛰고, 생략하자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서 한 발 더 멀어졌다.

또 시간이 지나갔고
그는 한발씩 내게서 더 멀어져갔다.


그렇게 나는 그를 놓쳤다.



다시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다시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다시 반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설레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익숙해져야, 편해져야 살 수 있는 것은 또한 필연적이다.
이 강력한 모순 사이에 끼어있는채로 나는 아직도
그의 아우라에서 벗어나지 못하나보다.

그가 물리적으로 항상 늘 곁에 있어준 건 아니지만
언제나 든든했다.
그 든든함이 몹시 그립다.
그가 나의 남자라는 사실 만으로, 그가 세상 어디에 있든지
나는 그 한 사람만 있으면 되었다.
그의 여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설사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익숙함의 부작용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휘청거리는 날 잡아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줄,
그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하는 회의감도 들고.


참 우울한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종일 휘청대던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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