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음속이나 머릿속이나 주변이나
온통 그 녀석과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단순했었다.
그를 사랑하고. 그는 나를 사랑하고.
그는 그의 할 일을 하고. 나는 나의 할 일을 하고.
모든게 단순했고 쉽기만 했었다.
그는 내 마음과 머릿속 같았고 나또한 그랬었다.
처음엔 쉽게 잊혀지는 것 같았다.
그래..그 많은 시간이라면 지칠때도 되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쉽게
그의 손을 놓아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내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간들이 흘렀다.
나에게 집중하고 몰입하고.
그와 함께 했던 공간들이며 그와의 추억이 있는 물건들이
그저 그 장소, 그 물건이 되어갈 무렵이 되면서, 잘 극복했구나.
그래 나는 이제 혼자서 갈 준비가 되었구나.
기특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주변이 술렁이더니
일그러지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씩 그렇게 되어버렸다.
나를 지탱해주던 등뼈가 쏙 빠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빈자리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힘들었다.
갑자기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날 덮치기 시작했고
감당하기 힘들어 바닥을 길 정도로
온 몸에 기운이 없었다.
밤마다 짐승처럼 울었다.
온 얼굴이 벌겋게 갈라지고 눈의 핏줄이 터지도록 울었다.
수돗물 한방울까지도 그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마시는 공기 한줌까지도 그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 연결은 참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
추운 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울다가 지쳤고
가족에게 기댔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나는 얇게 덮여있다 터져버린 상처를 꿰매고 약바르며
그렇게 겨울을 버텼다.
봄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의 감나무에서 새순이 올라오려고 하자
갈라지고 메말랐던 내 가슴 구석에서도 그와 같은 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희망이라고도 부르고 긍정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용기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세상에 하나뿐이던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서 깨어나오고 처음 본 건
뿌옇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웠던 산등성이.
처음 들은건 바람소리.
처음 맡은건 얼음에서 이제 녹아 물에 젖은 흙냄새였다.
그제야 세상이 보였고, 들렸고, 향기가 베어왔다.
그때서야 그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와의 이별을 외면했었다.
가볍고 소소한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에 집중하고
그 슬픔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 만나던 단순한 나를 이어가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그가 정리되지 않음을 알았고
어떤 형태로든 내 주변에 있는 것 같은 그를 정리해야,
내 머릿속에 지난 4년간처럼 당연하게 존재하는 그를 정리해야
나도 무엇이든 새로 시작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는 내게 행복이고 기쁨이었던 사람이었다.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과 정성을 쏟아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끔찍하게 그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사랑했었던 나도, 그도
이제 차곡차곡 정리해서 잊기로 했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듯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깊이 사랑한 만큼 헤어짐이라는 지옥의 깊이가 배로 길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그게 누가 될지라도,, 그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지라도.
내 마음 내 온몸을 쏟아부어 사랑할 것이다.
내가 살아오며.
내가 사랑하며.
배운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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