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지옥

2015.3.18.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ㅇ심해어ㅇ 2023. 6. 7. 00:53

이십대 중반, 취업도 못하고 학교도 졸업해 소속도 없던
딱 백수였던 그 시절, 똑같은 백수를 만난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에게 기념일이니 생일이니 챙기지말고
마음만 나누자고 했었다. 내가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서,
또 그가 부담을 가질까 봐.

그는 동의했었지만 그래도 뭔 날이 되면
작지만 소박한 선물을 주었다.
나는 기념일 같은 날들을 챙기기보다
평소에 반찬을 해서 주거나
목도리를 떠주는 식으로 뭔가를 직접 만들어 보답했고

그가 그 마음을 알 거라고 착각했었다.

종국에 그가 내게 남긴 말은
날 사랑하지 않는 것같다. 너에게 받은 것이 없다.
였고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네 놈이 사랑이 뭔지나 알기나 하는 놈이겠냐고.
차라리 잘됐다. 가버려라 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누군가를 만났고 사람들이 그가 어떠냐고 물으면
나는 그가 날 많이 사랑해 준다고 대답했다.
엄청 잘해줘. 뭐도 사주고 뭐도 해주고...
말하다가 멈칫했었다.

그가 내게 선물을 얼만큼 사주느냐가
그의 사랑의 크기였던가.

사랑을 하면 이것저것 해주고 싶어하는 게 사람 마음이니
능력껏 무언가를 해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나에게 쓰는 금전적 씀씀이가 그 사랑의 척도가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많이 사랑하는 만큼 무리해서 선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한다고 모두가 그 크기만큼 돈을 쓰는 건 아니다.
그 외의 것들, 그의 시간을 많이 써준다거나
다른 것을 포기하고 데이트를 한다거나
내 상황을 먼저 배려하는 등 분명히
돈을 쓰지 않고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들 쉽게
비싼 선물을 비싼 사랑이라고 동급취급을 한다.


얼마 전 만난 동생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길 사랑하지 않는것 같다고.
분명 돈은 잘 버는것 같은데 선물한번 받아본 적 없다고.

"언니,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안쓰는 이유는
돈을 쓸 만큼 그 여자에게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래요."

그래서 너는 그에게 그만큼 가치있는 여자로서
뭘 해줬는지,
그리고 그가 돈 이외에 너에게 써준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말하려다가 관뒀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지 않을 뿐더러
동생을 책할 입장도 되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갑자기 그가 내게 남긴 "사랑하지 않는것 같다"는
그 말이 며칠 동안 메아리처럼 울려 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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